송년회
시작은 그랬다. 하긴, 인생의 모든 시점이 다 시작이기는 하지만.
일부 임원들의 직장 내 괴롭힘과 성희롱에 대한 제보를 받은 노동조합에서는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임원들에 대한 무기명 설문조사를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노조에서는 설문 작성자에 대한 비밀유지를 보장하였지만, 직원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믿지 못한 것은 노조가 아닌 회사였을 것이다. 노조가 설문조사를 근거로 특정 임원에 대한 인사조치를 요구해도 회사는 법적근거가 없다고 하거나, 진위를 확인하려면 설문조사 내용을 달라고 할테니. 임원에 대한 인사조치없이 설문조사 결과가 나빴다는 사실을 알면 보복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악명 높던 임원들 산하의 설문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매우 좋았다. 다만, 설문회수율이 매우 낮았을 뿐. 뒤끝있는 모 임원의 경우 산하 30여명직원 중 설문지를 작성한 사람은 단 2명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직원들 사이에 평판이 좋던 3명의 임원이었다. 인품도 좋고 성과도 좋던 3명에 대해서 설문결과도 좋고 설문응답율도 높은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노조가 원했던 소원수리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설문조사는 조용히 넘어갔다.
부문 송년회가 있던 날. 평판 좋던 3명 중 2명의 임원 산하 부문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 같은 식당을 잡았다. 임원도, 직원들도 양쪽을 오가며, 내년에도 잘 해보자고 다짐을 한다. 이런 자리에서는 가끔은 나도 술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병원에서 알코올 알러지가 있으니, 술 한 잔도 위험할 수 있다는 판정을 받은 지라 송년회 때에도 술은 멀리 할 수 밖에 없었다.
흥겨운 자리에서 내년에 대한 각오를 다짐했던 다음 날. 평판 좋던 임원 중 1명이 오전 11시경에 퇴직 통보를 받았고, 다른 1명은 오후 2시에 퇴직 통보를 받았다. 인사발령은 그 날 오후 6시경.
피인수된 회사의 임원은 인품이나 성과와 상관없이 떠나야 함을 느끼게 된 사건이었다.어쩌면, 오히려 뛰어나서 제거 대상이 된 건 아니냐는 수근거림이 사실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유는 의사결정권자만 알고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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