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8]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 요즘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글귀입니다.
원래는 전한(前漢)시대 원제(元帝)의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왕소군(王昭君)은 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 삼국지연의의 초선(貂蟬)과 함께 중국 고대 4대 미인으로 불립니다. 혹자는 초선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이라며 4대 미인에 초선 대신 초나라의 우미인(虞美人)을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서경잡기에 의하면, 평소 한원제는 후궁이 많아서 화공(畫工)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그걸 보고 누구와 동침할지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많은 궁녀들이 어떻게라도 황제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다 보니 화공의 그림은 매우 중요했죠. 그 점을 이용하여, 화공이었던 모연수(毛延壽)는 자기에게 재물을 바치고 아부하는 궁녀들의 모습만 아름답게 그려서 황제에게 올렸습니다. 왕소군은 뛰어난 용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입궁한 지 수년이 지나도 황제의 눈에 띄지 못했다고 합니다.
왕소군이 변방으로 시집가다 (昭君出塞)
원제 경녕(竟寧) 원년(BC.33)에 흉노의 왕 호한야(呼韓邪)가 한나라와 혼인 화친을 청하였고, 원제는 얼굴을 본적 없는 왕소군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가는 날 원제는 왕소군의 용모를 처음 보게 되고, 그 미모에 크게 놀라고 맙니다. 그는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 싫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라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로 크게 노한 원제는 후에 모연수를 죽이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전승에 따라서는 왕소군은 총명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컸다고 합니다. 궁녀로 있으며 외모 치장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원제의 눈에 띄지 않던 그녀는 나라의 평화를 위해 흉노에게 시집가겠다고 자원을 합니다. 평소 왕소군을 눈여겨 보지 않던 원제는 그녀를 보내기로 결정하죠. 그런데, 호한야를 맞이하기 위해 치장을 한 모습은 절세미인이었습니다. 원제는 결혼을 취소시키고 싶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죠.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원제는 호한야를 부마로 맞이하여 평화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호한야를 불러서 잔치를 벌였고, 이때 원제는 자신의 총애를 받지 못했던 궁녀들을 불렀습니다. 이 궁녀들 중 왕소군도 있었는데, 왕소군을 본 호한야는 꼭 공주가 아니어도 된다고 했고, 원제도 공주보다 궁녀를 보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서 호한야에게 궁녀 중 선택하라고 합니다. 호한야가 주저없이 왕소군을 지목하자 원제는 그제서야 왕소군의 미모를 보며 후회를 하였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원제의 어명에 따라 예부의 대신들이 길일을 택한 후 호한야와 왕소군은 장안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절세미인을 아내로 맞이한 호한야의 더없이 기뻤죠.
호한야는 한나라를 위해 변경을 지키며 한나라 천자와 백성들이 영원히 평화롭게 살게 하겠다는 상주서를 원제에게 올렸으며, 흉노로 시집간 왕소군은 영호알씨(寧胡閼氏)로 봉해졌습니다.
또한, 왕소군은 흉노로 갈 때 많은 선물들을 가져갔고, 천 짜는 기술과 옷 만드는 기술, 농업기술들을 가르쳐 줘서 흉노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왕소군은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는데, 자식들 또한 한나라와 흉노 간의 우의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 다음부터 흉노와 한나라는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서 왕래가 많아졌고, 60여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호한야가 죽은 후 왕소군은 한나라로 돌아오가고 싶어 했으나, 한 성제(成帝)는 거절하며, 흉노의 풍습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왕이 죽으면 그 본처의 자식이자 다음 후계자가 될 이와 결혼해야 한다는 흉노의 풍습에 따라 왕소군은 호한야의 배다른 아들인 복주루약제(復株累若鞮) 왕과 결혼하여 다시 딸 둘을 낳았습니다.
죽은 후에는 흉노 땅에 묻혔는데, 그 무덤의 풀이 겨울에도 시들지 않아 청총(靑塚)이라 불리었다고 합니다. 네이멍구 지역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채옹의 금조에 따르면, 왕소군은 흉노의 수계혼 풍습에 따라 아들과 합방할 것을 강요받았는데 이를 거부하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민간 전승에서는 국경을 넘어간 후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함으로써 원제에게 절개를 지켰고, 흉노가 그 의기를 높이 사서 그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후세에 그녀의 운명을 기리며 두보의 영회고적오수(詠懷古蹟五首), 이방원(李芳園)의 새상곡(塞上曲), 백거이의 왕소군 2수, 상관의의 왕소군, 왕안석의 명비곡(明妃曲) 등 다양한 문학작품이 나왔습니다.
이 중 당나라 시대의 시인 동방규가 지은 시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시구가 나옵니다.
昭君怨三首 (왕소군의 원망 3수)
漢道方全盛 (한도방전성) 한나라는 나라가 번성하여
朝廷足武臣 (조정족무신) 조정에는 무신들이 넘쳐나는데
何須薄命妾 (하수박명첩) 어찌 하필 박명한 아녀자인가
辛苦事和親 (신고사화친) 힘든 화친의 길을 맡는게
揜淚辭丹鳳 (엄루사단봉) 눈물을 삼키며 궁궐을 작별하고
銜悲向白龍 (함비향백룡) 슬픔을 머금은 채 흉노 땅으로 향하네
單于浪驚喜 (선우랑경희) 선우는 놀라 기뻐하지만
無復舊時容 (모부구시용) 예전의 낯빛을 다시 볼 수 없으리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저절로 허리띠가 느슨해지는데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이는 허리와 몸이 원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시구는 봄이 왔지만 춥고 꽃이 없음을 뜻했지만 이후 계절은 좋은 시절이 왔지만 아직도 상황이 좋지 않음 나타내는 의미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봄은 와서 꽃도 피지만, 코로나19로 마음껏 봄을 느낄 수 없는 지금도 춘래불사춘이라고 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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